윤치호 (尹致昊, 1865년 1월 23일 [1] ~ 1945년 12월 6일)는 조선, 대한제국 의 개혁, 민권운동가,문신이자 외교관, 언론인, 교육자, 한국 의 정치가, 교육자, 사상가, 언론인, 종교가였다. 1888년 그의 나이 24세 때 윤치호는 미국 유학길에 올라 벤더빌트 대학교 (vanderbilt university)와 에모리 대학교 (emory university)를 졸업한다. (우리에겐 애국가를 작사한 사람으로 더 친숙하게.
#에모리 #미국대학 #emory #윤치호 #에모리윤치호 #최초의한국유학생 #미국유학 #근대조선지식인 댓글 1 인쇄 윤치호는 1888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동부의 밴더빌트 대학에서 2년 동안 신학과 영어를 수학하고, 1891~1893년 에모리 대학에서 인문사회과학, 자연과학을 수학, 졸업한다. 1893 년 가을, 윤치호는 미국 에모리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윤치호가 유학하던 시기인 19세기 말의 미국 남부는 기독교적 이상과 사회진화론이 현실에서 충돌하는 곳이었다. 1888년 윤치호 선생은 영 알렌 박사의 주선으로 미국 테네시 주 내슈빌에 있는 밴더빌트 (vanderbilt) 대학에 신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으로 입학했다. 놀랍게도 그 점쟁이는 윤치호가 미국 유학 중이라는 것과 중국인 아내와 결혼했다는 사실까지 맞혔다고 한다. 그는 당시 조선인 중 손꼽히는 미국내 대학 졸업생의 한사람이었다.
구한말에는 갑신정변 으로 피신했다가 귀국, 독립협회 활동, 독립신문 발행인과 제2대 독립신문사 (獨立新聞社) 사장. 5년간의 노력 끝에 마침내 조지아주 아틀란타의 에모리 대학을 졸업한 그는 한국인 최초 미국 대학 졸업자가 된다. 특히 미국에 유학하는 시기 [1888년 9월부터 1893년 11월까지]에 집중해서 살펴보고자 했다. 이 글에서는 근대 한국의 대표적인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인 윤치호의 사회진화론 수용과 그 특성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 연구는 윤치호의 미국 유학 경험이 그의 사회개혁사상 형성에 미친 영향을 살피는데 목적이 있다. 한민족 5천년 역사상, 미국에서 처음 대학을 졸업한 사람 1호가 윤치호이다. 그해 가을 그는 다시 상해로 이주하였으며 모교인 중서서원에서 영문법을 강의하였다. [20] 다만 절에 있는 승려들에 대해서는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들었는지, 땡중 취급하며 비하하는 내용과 온갖 푸념을 일기에 썼다.